작별인사 -김영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휴머노이드에게 우주와 생명체의 의식에 대한 정의와 믿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하게 존재했던 어떤 진리, 우리가 극히 일부분을 알고 나서 모두 깨달은 척 어떤 조각만을 가지고 휴머노이드를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만 생성된 진리의 조각.
휴머노이드들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냈기에 그 이상의 사유와 철학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공식처럼.
일반적인 인간처럼 그것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메카니즘까지는 닮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닮은 모습 안에서 정해진 그 나름의 윤리의식이란, 수용소의 전기가 끊길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생존을 위해 자신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휴머노이드들은 인간과 매우 닮은 행태를 보여주어 증명되었다.
선이는 한편으로는 이를 부정하고 다른 휴머노이드들과는 달리 인간의 감정에 거의 유사하게 발전되어가고 있었다. 클론으로써 지니게 된 사명같은 것이었나.
휴머노이드를 만들어는 놨으나 그 이후의 의식 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는 밝혀내지 못한 채 각자의 한정된 지식 안에서 이것이 과학적이기 때문에 옳으며 이것이 내 생각이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선이는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이미 역사 속에서 보여준 인간들의 한계를 휴머노이드를 통하여 벗어나 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없었는가 생각케 한다.
어떠한 사건에 대해 드는 인간의 감정이 굉장히 개인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고 타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뇌과학과 정신과학의 면에서는 이미 정해진 루트가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질병과 죽음 앞에서 가지는 인간의 감정의 흐름에는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비판의 5단계 인지과정이 있다. 물론 각 단계에서 경계와 단계의 스킵, 단계를 되돌아가는 등의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 휴머노이드에게 심어놓은 이러한 인간의 감정 또한 공식처럼 한계가 있는 데이터 안에서의 반응일 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꼭 좋았던 무언가를 향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익숙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탈출, p.112-
오만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마치 창조주인 양 휴머노이드를 만들어 놓고는 폄하하였다. 인간의 감정을 심어줄 수 있지만 결국 인간의 지배 하에 제어를 하겠다는 무책임한 심보가 얼마나 잔인한가. 자신들의 세계에서도 오류가 있고 실수가 있으며 후회가 있으면서.
민이의 잘린 머리를 가지고 새 몸을 받아 살리겠다는 선이. 호수를 바라보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어진 걸까 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인간의 마음을 대변하는 부분이었다. 왜 나는 감정이 있어서 슬픈 일을 당하며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내게 아무 감정이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무수한 날들이 떠올랐다.
-겨울 호수와 물수리-
임계점을 넘어가는 극한의 고통은
나중에 그 어떤 기쁨이 주어지더라도
장부상의 숫자처럼 간단히 상계되지 않습니다.
-달마, p.149-
나는 이 대목에서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성경의 욥기가 떠올랐다.
하나님과 악마의 자존심 대결에 희생된 욥. 온 몸에 피부병이 걸리고 가족들이 죽었으며 재산이 사라졌고 친구들은 그가 저주에 걸렸다며 와서 탓하고 판단하고... 그 후에 그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새 가족들을 선사하고 더 큰 재산을 주었다고 했다는데 내 허접한 믿음으로썬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꾸만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과 우주의 큰 의미인 양 말하는 선이가 나는 잠시 답답했다. 달마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많은 것을 겪은 현자처럼 말했다. 그렇기에 그 집착적인 논리와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이를 그냥 놔두고 만다. 누구도 옳고 그를 수는 없는 문제다.
애초에 휴머노이드에게 윤리와 감정을 넣었다는 것이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보려는 책임없는 시도 아니었던가.
-재판-
달마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는 철이. 처음엔 그저 인간으로, 아빠의 아들로 다시 살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클론 선이와 인간의 만족을 위해 애완용으로 만들어졌다 버려진 민이를 겪으며 자기를 만든 아빠의 선택과 인간의 이기심에 의문을 가진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매분 매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기득권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은 정치, 종교, 경제 등 각 분야에서 그들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사람들을 몰고 간다. 철이의 생각의 과정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극단적인 사상의 혼란과 비슷하다.
-몸속의 스위치-
유한한 삶은 지속성이 절실하다. 사후세계를 생각해내고 죽음 이후의 삶은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말이 이상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또는 현생에서 이루거나 가져보지 못한 것들을 그곳에서는 가능하다고 꾸며댄다. 현생을 아쉽고 한심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고 곧 종교의 틀 속으로 밀어넣어 버린다. 실례로 성경의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천국이 금과 각종 보석으로 이루어져있어 종교를 탄압하거나 이 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것들을 누릴 수 없을 것이며 이 편에 서야 가질 것이라고 꼬드기는 느낌. 천국이라면서 죽어서까지 빈부가 나뉘어야 되겠는가.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 안에서 상상할 수 밖에 없다더니 뭔 천국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들의 세계에서 비롯한 각종 금은보석이었나 이걸 믿으라는 건가 싶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외경의 존재와 각종 지역종교의 혼합을 생각한다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석양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어 매일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마지막 인간, p.286-
나는 7세 미만의 아이들이 좋다. 그들은 매일 봐도 지루하지가 않다. 한때는 남의 아이들이지만 정성을 다해 놀아준 적도 있었고 마치 부모라도 된 양 올바른 것을 말해주기도 했으나 결국 남이었으며 커가면서 이 사랑과 같은 감정들이 모두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부터 아이들과는 약간 거리를 두며 산다. 그게 나의 에너지 소모를 막아주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대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너무 몰두해 본 자가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생의 나를 지키려는 노력이며 여전히 마음 속에는 사라지지 않을 나라는 인간속 기질이며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있다.
영원히 인공지능의 데이터로 남아야만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철이의 의식과 감정이라는 것은 무책임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일지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사라졌다고 존재했던 사실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소설은 참 경이롭다. 두 세계를 잇는 커다란 일이다. 글에서 하나 이상의 세계가 클라우드처럼 둥둥 떠오른다.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그런 것에서 사람들이 현생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미친 듯이 뛰고 일해도 잠을 잘 수 밖에 없는 것처럼.